파괴적 기술에 국가의 스타트업화로 맞서는 에스토니아

<전명산의 블록체인 아고라>

  • 전명산 블록체인OS CSO
  • 입력 : 2017.10.23 10:30:20   수정 : 2017-10-25 09:57:02
  • 프린트
  • 이메일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공유
지난 9월 중국이 암호화폐에 대한 규제를 본격화하면서 한국, 미국, 대만 등 몇 개 국가의 정부들이 암호화폐 규제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부는 지난 9월 29일자로 모든 형태의 ICO(Initial Coin Offering)에 대한 전면 중단 정책 발표와 더불어 암호화폐 거래소 현장 점검을 실시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규제의 끈을 조이기 시작했다. 이 정책으로 이제 막 ICO를 준비하던 한국의 블록체인 기술업체 몇 곳이 개점 휴업을 해야 했다. 이미 받았던 돈을 돌려주는 업체도 있었다.
한국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타당하고 적절한 측면이 있다. 9월 중순까지만 해도 강남 근처의 저잣거리에서는 다단계 조직들이 아무런 기술적 가치도 없는 잡다한 암호화폐들을 만병통치약처럼 홍보하며 떼돈을 긁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들의 피땀을 빨아먹는 다단계와 같은 작태들은 당연히 막아야 한다. 그런데 각국 정부들의 규제 정책 뒤에는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존재한다. 바로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한 암호화폐가 개별 국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일본, 스위스 등 극소수 나라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국가들이 비트코인을 공식 화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트코인은 엄연하게 가치를 가진 물건으로 거래되고 있고 일부에서 교환수단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더구나 비트코인을 이용한 자금세탁, 자산 증여, 해외 재산 도피와 같은 일들도 빈번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정부 입장에서 비트코인을 규제하지 않으면 세금 추징 등 경제 시스템 관리에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전세계 모든 정부가 일시에 비트코인을 규제하지 않는 한, 비트코인을 막을 수는 없다는 데 있다. 비트코인은 9월 말 중국의 강력한 통제 정책에 일시적으로 가격이 절반 이상 급락한 이후 10월 초 다시 최고가를 경신했다. 비트코인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회복력이다. 이것은 일국의 규제가 비트코인의 가격에 일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비트코인을 통제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각국 정부는 국경을 넘나드는 기술 앞에서 이를 막을 뾰족한 방법도 없지만 막지 않으면 통제력을 상실할 것 같은 두려움에도 직면하고 있다. 국가의 통제력이 가장 강력한 중국이 비트코인과 암호화폐를 규제하는 최선두에 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고 중국이 블록체인 기술을 미워하거나 배척하는 입장은 아니다. 중국은 오히려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는 나라들 중 최선두 그룹에 속한다. 중국은 이미 십여 개의 공공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으며 특히 블록체인 기반의 디지털 위안화(법정 디지털 화폐)에 대한 테스트를 마쳐놓은 상태다. 즉 중국은 블록체인 기술 자체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어하면서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이 있는 암호화폐는 통제하려는 것이다.

 기사의 1번째 이미지
사진설명비트코인 9월 ~ 10월 가격 흐름 [사진 출처 : Coinmarketcap]
▶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기술적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환경은 인터넷에 그 기반이 이미 구축됐다. 그러나 인터넷은 사실상 국가 단위로 관리됨으로써 실질적으로 국가의 통제 안에 있다. 그런데 블록체인 기술은 P2P를 근간으로 하고 있어 기술적 기반 자체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구조다. 비트코인은 블록체인 위에서 작동하는,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최초의 암호화폐다. 그리고 비트코인이 세상에 나온지 9년 만에 2000여개가 넘는 암호화폐가 자웅을 겨루고 있다. 이 화폐들의 전체 시가 총액은 200조원에 육박한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암호화폐 경제’(Crypto-economy)이라고 할만한 새로운 경제 영역이 구축된 것이다.

현재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의 암호화폐 가격들이 급상승하는 이유는 블록체인 기술이 갖고 있는 미래가치가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블록체인 기술을 좀 아는 사람들 입에서는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를 무력화시키거나 최소한 법정화폐와 경쟁할 것이라는 전망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단지 암호화폐만으로도 이러한데 블록체인 기술이 결제, 금융, 보험 등 기존 산업구조를 대체하기 시작한다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암호화폐란 블록체인 관련 기술 개발과 경제시스템을 견인하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암호화폐 경제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지구라는 단일한 표면 위에서 작동하는 첫번째 글로벌 경제시스템이 비로소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본의 국제화, 다국적 기업과 초국적 기업의 등장, 금융의 국제화 등으로 경제 시스템 자체가 글로벌화됐다는 해석이 많았다. 하지만 그 금융시스템이나 경제시스템의 구체적인 운영은 결국 개별 국가들의 정책과 가이드라인에 따른 간섭과 통제 아래서 작동했다. 즉 글로벌 규모의 경제망이 구축된 것은 사실이지만 개별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실질적으로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글로벌 경제시스템이 현실에 등장했다.

이 시스템은 기존 국가들이 해왔던 방법으로는 쉽게 통제되지 않을 것이다. 한쪽에서 제재하면 다른 국가에서 살아남을 것이고 더 강한 통제가 들어오면 일본, 홍콩, 싱가포르, 스위스, 에스토니아 등 암호화폐를 적극적으로 포용하려는 국가들로 이동할 것이다. 따라서 어떤 나라의 정부가 이 기술을 억압하는 순간 그 나라는 블록체인 기술의 주도권을 놓칠 수밖에 없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를 전략적으로 포용해 경쟁력을 높이려는 국가들이 존재하는 한 블록체인 기술과 암호화폐를 억압하는 것은 결국 해당 국가 자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뿐이다.

바로 여기에 정부 당국자들의 딜레마가 존재한다. 그냥 두고 보자니 국가가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경제시스템에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 것 같고 블록체인 기술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암호화폐를 억압하자니 기술 주도권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러한 고민은 지구상의 모든 정부 당국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듯 하다. 비트코인의 가격이 상승하면 할수록 정부 관계자들의 고심이 깊어질 것이다. 한국의 정책 담당자들 역시 ICO에 대해 당장은 강력한 규제를 선언했지만 속내는 편치 않을 것이다. 정부가 모든 ICO를 금지한 사이 다른 나라의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은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주 특이한 행보를 걷는 나라가 하나 있다. 바로 에스토니아다. 2017년 8월 25일 에스토니아는 중앙은행이 지원하는 암호화폐 에스트코인(Estcoin)을 발행하고 ICO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했다. ICO는 지금까지 블록체인 스타트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사용됐고 중국, 한국, 미국 등 여러 국가들이 ICO를 직접적으로 규제하고 나선 마당에 한 나라의 정부가 스스로 ICO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했으니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당장 유럽 중앙은행만 해도 에스토니아의 정책을 대놓고 비판하고 나섰다. 안팎의 비판으로 에스토니아는 현재 ICO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다소 애매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어 실제로 진행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암호화폐를 단순히 제어하거나 억압해야할 대상으로 보지 않고 바로 그 게임에 국가 스스로가 뛰어들 수 있다는 상상력 자체가 놀랍다. 국가 스스로가 국경을 파괴하는 스타트업의 행보를 채택한 것 아닌가?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스토니아는 전자정부 시스템에서 최선두에 서 있는 나라다. 인구 130만명의 작은 나라인 에스토니아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전자정부를 추진해왔고 세계 최초로 전국민 전자 ID 시스템과 전자투표 시스템을 도입한 바 있다. 또 2015년에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 시민권인 e-Residency를 발행해 전 세계인들이 에스토니아의 시민권을 얻어 에스토니아에 회사를 설립하고 금융 거래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덕분에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은 유럽에서 스타트업들이 가장 많이 설립되는 스타트업의 성지로 등극했다.

 기사의 0번째 이미지
사진설명에스토니아의 e-Residency 전자신분증. EU 내에서도 신분증으로 사용 가능하다 [사진 출처 : 에스토니아]
블록체인 기술 도입에도 에스토니아는 선두그룹에 서 있다. 지난 2008년부터 블록체인 기술을 연구해 온 에스토니아 토종 기업 가드타임(Guardtime)과 함께 투표 시스템, 의료정보 관리 시스템, 전자 ID 관리 시스템 등에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급기야 정부 스스로 암호화폐를 발행하고 ICO를 진행하겠다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국경을 파괴하는 블록체인 시대를 맞이해 오히려 국가 스스로 기존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서 탈국가 시대의 새로운 국가 모델로 진화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막을 수 없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은 비효율과 산업 지체 현상을 낳을 뿐이다. 다단계와 같은 비도덕적인 세력들에게는 강력한 철퇴를 가해야겠지만 새로운 산업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블록체인 기술 업체들에게는 과감하고 파격적인 육성 정책을 시행해야 하지 않을까? 90년대 말 인터넷을 잘 몰랐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빌 게이츠와 손정의 회장으로부터 ‘앞으로의 미래는 브로드밴드(인터넷 통신망)에 있다’는 조언을 듣고 곧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 결단 덕분에 2000년대 초반 한국경제가 다시 급속하게 회복할 수 있었고 현재까지도 한국은 IT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바로 지금이 우리에게 이와 같은 혜안과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국가 스스로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국가의 스타트업화’를 추구하고 있는 에스토니아의 선례가 있지 않은가?

[전명산 블록체인OS CSO]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섬네일 이미지
전명산 블록체인OS CSO 다른기사 보기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대학원을 중퇴했다. 블로그 기반 미디어인 미디어몹의 기획팀장, SK 커뮤니케이션즈 R&D 연구소 팀장, 스타트업 대표 등 20년간 IT산업 영역에서 일을 했다. 현재는 블록체인 기술 전문회사 블록체인OS에서 근무 중이다. 2012년에는 원시사회부터 21세기까지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분석한 '국가에서 마을로'를, 2017년에는 블록체인 기술의 사회적 의미를 분석한 '블록체인 거번먼트'를 출간했다.